“과학엔 ‘축적의 시간’ 필요… 노벨상 타는 것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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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0-24 00:00본문
■ 올 노벨 화학상 후보 올랐던 현택환 서울대 석좌교수
선배 학자들도 아직 못받아
내가 받을 순서는 아니었다
美서 귀국뒤 가장 잘한 선택은
나노 연구로 진로 바꾼 것
‘나노입자 대량합성’ 논문
3000회 가까이 인용돼
다양한 논문 많이 읽어두면
연구할 때 영감에 큰 도움
“축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겸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입자연구단장은 무심히 툭 한마디 던졌다. 지난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나 노벨상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까 망설이던 참이었다. 그는 인터뷰 닷새 전(한국시간)에 발표된 노벨 화학상을 받지 못했다. 2020년 노벨 화학상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개발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샤르팡티에와 미국의 제니퍼 다우드나 2명의 여성 학자에게 돌아갔다. 학술정보전문업체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는 약 한 달 전에 현 교수를 한국 과학자 중 유일하게 유력 노벨상 후보로 거론했다. 클래리베이트는 2002년부터 생리의학·물리학·화학·경제학 분야에서 논문 피인용 빈도가 상위 0.01%에 드는 총 336명의 우수 연구자를 노벨상 후보로 선정, 이 가운데 54명이 실제 상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학문적 성과와는 별개인 노벨 평화상을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수상한 기록 말고는 전무다. 특히 경제학을 제외한 과학 분야 3개 노벨상은 이웃 일본이 24명의 수상자를 배출하는 동안 단 1명도 받은 적이 없다. 그만큼 대한민국 국민의 자존심도 상해 ‘올해만은’ 하는 기대감이 높아졌던 것도 사실이다.
―9월에 유력 후보로 뽑혔을 때 여러 언론사가 앞다퉈 기사를 쓰는 등 작은 소동을 빚었죠.
“네, 그런데 저는 ‘솔직히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내 연구의 뿌리가 되는 선배 학자들의 업적도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고 담담하게 털어놓았거든요. 지방지 기자들이 대구 생가에까지 쳐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현 교수는 왜 올해 자신이 노벨상을 받을 순서가 아닌지 학문적 계보를 따지면서 역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클래리베이트의 예측은 과학 분야에서 더 정확합니다. 최근 10년간 80명의 노벨상 수상자 중 28명이 후보로 올랐던 인물입니다. 35%의 정확도가 갈수록 더 높아지는 느낌이에요. 과학의 복잡성이 증가함에 따라 공동 논문이 많아져서 일급 연구자끼리의 협업도 늘어나죠. 받을 만한 사람이 뻔해지는 거라고 할까요. 그런데 노벨상 후보로 올랐다가 그해에 곧장 수상에 성공한 경우는 힉스 입자를 예언했던 피터 힉스와 프랑수아 앙글레르(2013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1964년 힉스 이론을 선구적으로 수립한 지 49년 만의 일이었죠. 후보로 선정된 후 짧게는 1년, 길게는 10년 이상 지난 후에 실제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과학에는 이렇게 ‘축적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축적의 시간’은 현 교수가 2015년 서울대 공대 동료 교수 25명과 함께 공동저자로 참여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서로 다른 전공의 국내 석학들이 우리나라 산업의 미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도전과 실패의 오랜 경험 축적에서 나오는 창의적 개념설계 능력이 중요하다’고 제언해 당시 큰 주목을 받았다. 추격형 양적 성장의 한계에 다다른 한국 경제에 주는 따끔한 고언인 셈이다. 그의 ‘축적론’은 이어졌다.
“한국에서 화학 전공으로 학·석사를 마치고 1991년 미국 일리노이대로 유학을 갔습니다. 박사 과정 첫 3년간은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어요. 하지만 졸업 논문은 최우수논문상인 ‘파이퍼 상’을 탔습니다. 그리고 귀국했지요. 이때 지금 생각해도 제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 중 한 가지를 하게 됩니다. 바로 미국에서 했던 모든 공부를 제로로 돌리고, 나노 연구에 평생을 걸겠다는 결심이지요.”
일리노이대에서 음파화학 전공으로 무기화학 박사를 취득한 그는 이듬해인 1997년 서울대 교수로 자리를 잡자 유학 말기부터 마음을 빼앗겼던 나노 연구로 과감하게 방향을 180도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나노란 용어 자체가 생소했던 시절이라 선배 교수가 “니나노의 나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고 농담을 건넬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는 나노 테크놀로지가 새롭게 부상하는 최신 과학 분야로 주목받았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7년 취임과 동시에 나노텍 육성을 국가 핵심과제로 선언했을 정도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제 생활은 ‘읽고 쓰기’로 요약됩니다. 논문을 읽거나 논문을 쓰는 게 일과죠. 이것저것 전공과는 좀 동떨어진 논문이라도 읽어두면 나중에 연구에 큰 영감을 받는 일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유학을 마무리할 무렵부터 나노 관련 논문이 큰 흥미를 끌었어요. ‘이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들었죠. 귀국해서 교수로 자리 잡자마자 실천에 옮긴 겁니다. 그리고 4년 후인 2001년 미국 과학저널 사이언스에 ‘균일한 나노입자 합성’ 논문을, 2004년 네이처 머티리얼스에 ‘균일한 나노입자 대량합성’ 논문을 싣게 됩니다. 제 대표작으로 꼽히는 논문이죠. 앞 논문은 편집자 선정 권두 논문으로 약 1700회, 뒤 논문은 더 많이 3000회 가까이 다른 논문들에 인용됐습니다.”
슬슬 현 교수의 평생 연구 주제인 나노 테크놀로지에 대해 이야기할 시점이라고 느꼈다. 나노(Nano)는 그리스어로 난쟁이를 뜻하는 나노스(Nanos)에서 유래된 용어다. 한마디로 아주 작다는 의미다. 나노미터(㎚)는 1m의 10억 분의 1(10-9m) 길이다. 머리카락 지름의 5000분의 1, 분자나 원자의 크기다. 물 분자나 금 원자가 0.3㎚ 정도 된다.
“스승·제자 노벨상 받는 美 학맥 부러워… 젊은 학자 연구 돕겠다”
과학 3관왕 된 나는 복받은 사람
사제간 연구 면면히 이어지도록
받은만큼 더 베풀어야겠다 생각
소재성질 제어하는게 나노기술
열 잘 견디게·엄청 가볍게 등
응용 가능한 가짓수 무궁무진
메디컬 테크놀로지에 관심 많아
올2월 뇌전증 발작 실시간 탐지
뇌센서 연구로 네이처지에 논문
자가면역질환 극복도 도전 과제
우리 혈관 안에서 혈액을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단백질의 크기는 30∼40㎚다. 앞서 클린턴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 의회도서관에 소장된 모든 정보를 각설탕 한 덩어리 크기에 넣을 수 있는 기술”이라고 나노의 위력을 설명했다.
나노가 단순히 작게 만드는 기술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나노 크기로 작게 줄이면 표면적이 엄청 커지는 것은 물론이고, 물질 자체의 성질이 변한다. 황금은 나노 사이즈로 작아지면 포도주색으로 변한다. 중세인들은 이를 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채색에 이용했다. 원리는 몰랐지만. 어렵게 말하면 분자나 원자 크기만큼 작아지면 원자 주위를 도는 전자의 움직임에 제한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에 따라 빛 등 모든 물리법칙이 바뀐다. 이처럼 아주 작거나 우주 단위로 아주 커지면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된다. 그래서 나노는 작아짐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현상들의 집합체를 뜻한다. 이 새로운 현상 중 인간에게 이로운 것을 극대화하려고 과학자들은 큰 걸 잘게 쪼개는 톱다운, 점에서 쌓아 올려 나노 크기로 성형하는 보텀업 방식을 동원해 온갖 재료를 삼각형·원형으로, 평면·입체로 잘라도 보고 쌓아도 보고 한다.
―왜 나노기술이 중요한가요.
“모든 다른 기술을 도와주는 ‘도우미 기술’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정보기술(IT), 바이오기술(BT)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나노기술(NT)이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봅시다. 이 제품은 디스플레이, 배터리, 마이크로프로세서 같은 반도체 칩 등 여러 가지 부품을 조립해 만듭니다.